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2013. 8. 9. 09:52catholic/보편된이야기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루치아와 사촌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가 양들에게 풀을 주기 위해 목초지로 가다가 성모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20세기초에 나타난 성모님의 발현으로 흔히 이를 ‘파티마의 성모’라고 부릅니다.

 

    성모님은 어린 목동들에게 속죄와 회개, 묵주기도를 자주 바칠 것과 성직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고 ‘구원의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루치아 수녀의 회고록을 보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뜻밖에도 가족들의 멸시와 박해였습니다.

 

    언니들은 루치아가 성모님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자 캄캄한 방에 가뒀으며, 심지어 엄마는 빗자루나 장작개비로 루치아를 때리면서 거짓말을 고백하라고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성모님 공경을 열심히 하였던 가족들이 실제로 자신의 딸 앞에 성모님이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심해서 구박하는 ‘박해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에서 가르침을 펴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는 목수의 아들이요, 어머니와 형제들은 우리동네 사람들이 아닌가?’(마태 13,56 참조) 라고 ‘지혜와 능력’을 의심하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들고 일어나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루카 4,29) 죽이려까지 하였으며, 친척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들러 나서기도’(마르 3,21 참조) 했습니다. 주님께서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태 13,57)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불교에도 이와 비슷한 예화가 있습니다. 마조(馬祖) 선사는 709년 사천성에서 태어난 뛰어난 선걸입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곡식 중에 섞여 있는 겨를 골라내는 키장이였는데, 성불한 다음 고향을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의환향한 마조를 성대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이때 개울가에 서 있던 노파가 마조를 보더니 깔깔 웃으며 말했습니다. “대단하신 스님이 오시는가 했더니 겨우 키장이 마씨네 꼬마 녀석 아닌가.”

 

    이에 마조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남깁니다.

    “권하건대 그대여 고향에 가지 마오 / 고향에서는 도를 이룰 수 없네 / 개울가의 늙은 저 할머니는 / 아직도 내 옛 이름을 부르는구나.”(勸君莫還鄕 還鄕道不成 溪邊老婆子 喚我舊時名)

 

    루치아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때린 어머니가 공경하는 성모님은 현존이 아닌 환상 속의 우상이며, 마조 선사를 비웃은 노파 역시 부처를 깊은 산 법당 속에서만 찾았습니다.

 

    예수를 미쳤다고 붙들러 다닌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마태 27,25) 하고 맹세한 유대인들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수가 아닌 제2의 그리스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교에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이 전해져옵니다. 당나라 때 양보(楊補)라는 사람이 사천에 유명한 무제(無際)보살이 있다 해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가던 양보는 ‘어디를 가오’ 하고 묻는 노인에게 ‘무제보살을 스승삼고자 길을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노인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그래’ 하고 말했습니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데요’ 하고 양보가 묻자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맞아주는 분을 만나게 될 텐데, 그분이 바로 부처시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자 이불을 두른 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오는 어머니 모습에서 비로소 양보는 ‘집안에 있는 부처’를 견성(見性)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눈이 멀어 있는 저’를 볼수 있도록 제 눈에 흙을 개어 발라주소서.’(요한 9,6 참조) 그리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해주소서.

 

    아이들 속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케 하시고, 아내의 눈빛에서 성모님을 느끼게 하시며,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의 형제 하나’(마태 25,40 참조)에게서 주님의 고통을 직시하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 2012.9.23 서울주보 / 말씀의 이삭 / 최인호 베드로┃작가